- 탈북자 한방치료
연길의 밤은 벌써 가을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택시 차창을 통해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가로등에 비추는 한글 간판들. 마치 30여년 전 한국의 어느 지방도시 같은 연길. 이방인으로 조선인들이 자치주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한 많은 도시. 북조선도 남한사람도 아닌, 중국인은 더욱 아닌 외딴섬 사람들의 외로운 섬. 8월 중순이 지난 연길은 조선족들의 아픔과는 상관없이 가을채비를 하고 있었다. 10개월만에 한방 진료 봉사를 하기 위해 찾은 연길은 어둠에 모습을 감추고 도시를 오가는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여행가방 속에는 몇 안 되는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제외하고는 침. 뜸. 혈압계. 그리고 엑기스 한약재가 가득 들어있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준비한 한약 엑기스 때문인지 가방은 배를 쑥 내밀고 볼품없이 그 형태를 잃어버렸다. 탈북자! 배가 고파 두만강 시린 물을 건너온 사람들.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조국을 떠난 난민들. 난민취급도 받지 못하고 중국 땅을 헤메이다가 중국 공안원에 잡혀 언제 북송될지 몰라 불안에 떠는 북조선 사람들. 부모형제를 버리고 두만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지고 인생을 던진 꽃제비들. 아! 탈북자에게 건강을 체크하고 약을 준다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사치스런 행위인가? 우선 하루 세끼 먹거리가 문제인데 허리가 아프다고 두통에 시달린다고 생리불순이 있다고 치료를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가증스런 일인가? 생과 사를 다투는 그들의 인생 앞에 의료인의 하얀 가운은 생명의 구원이 아니다. 우선 쌀 몇 되와 푸성귀 나물이 필요할 뿐이다. 엑기스 며칠 분 보다 라면 몇 개가 필요하고 침 몇 대보다 찐 계란 몇 개가 그들에게 더 긴요했다. 작년 10월에 진료했던 연길의 탈북자들.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분단의 현실을 일깨워준 그들. 그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혹시 공안원에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지나 않았는지? 그 동안 병세가 악화되어 몸져 누워버리지는 않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의료인의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다시 연길을 찾았다. 숨어서 아픈 탈북자들을 숨어서 진료해야 하는 연길은 애증이 같이 하는 도시였다. 서울에서 비행 3시간만에 갈 수 있는 연길이지만 머나먼 아프리카 보다 더욱 기아와 공포에 시달리는 탈북자들이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연길은 필자 가슴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 탈북자 뱃속은 기생충 천국
24세인 윤성환은 윤씨의 동생으로 올 5월에 탈북하여 아직 연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팔을 쑥 내밀어 혈압측정을 원했다.
“평생 혈압을 못 쟀는기라.”
혈압을 재고 있는 동생을 윤씨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니, 회충있제.”
성환이는 겸연쩍게 웃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 변소에서 회충이 꿈적이더라.”
성환이는 볼멘소리를 한다.
“나만 있는가.”
윤씨는 필자에게 설명조로 이야기 했다.
“하기사 우리 북조선에는 위생을 지킬 수 없습네다.”
성환이는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분뇨를 그대로 퇴비로 쓰고 소채(채소)를 씻지 않고 먹으니 회충 없는 주민이 없습네다.”
아! 다음 진료 때는 구충제를 준비해야겠다. 한 알에 회충. 촌충. 십이지장충을 한꺼번에 없애는 구충제를 말이다.
리춘애씨는 27세로 윤씨의 부인이다.
생리불순 냉대하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매일 배설이 안되어 고생이란다.
“대변이 안나와 매일 바빠요.”
원래 입이 짧아 소식하는데 더욱이 먹을 것이 없어 변비가 심하다.
혈압이 90~60으로 심한 저혈압에 몸이 차갑고 기력이 약하고 영양이 부족한 상태였다. 인삼을 몇 달 복용하면 혈색이 좋아지고 입맛 또한 당길텐데 우물에서 숭늉구하는 격이었다.
오적산 20일분을 투약했다.
몸이 냉하고 부인병에 효과가 있는 처방으로 소화기에 작용하여 식욕촉진을 기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21세인 김은숙씨는 윤성환의 부인으로 98년 1월에 탈북하여 윤씨 가족 중에는 최고참인 셈 이였다. 그 동안 조선족 가정에서 식모살이하다 몇 달 전 성환이와 눈이 맞아 잠자리를 같이 한단다. 텅 빈 가슴을 서로 맞대고 자다보면 쓸쓸한 마음이 위로되는지 일찍 짝을 맺은 셈이다.
2년여 탈북 생활에 돈을 모으지 못한 그녀는 돈을 많이 벌면 고향에 가서 사는 것이 꿈이란다. 하지만 연길에서 탈북자가 돈 벌기가 어찌 쉽겠는가.
“어데 아픈데 있습니까?”
“저는 땀을 세게 흔들고 피부가 굴벰진다 아닙니까.”
“굴벰지는 게 뭡니까?”
같은 민족이면서 이렇게 언어소통이 안될 수 있는가. 말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웠는지 치마를 훌러덩 올렸다.
피부에 발진과 발적현상이 나타났다.
일종에 피부 알러지 현상으로 몹시 가려워 밤잡을 설친다.
윤씨 가족 진료를 마치고 서둘러 나오는데 윤씨는 필자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입네다.”
서울에서 온 한의사로부터 진료받아 감격했는지? 별 과찬의 말씀을.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 특별한, 기쁘면서 마음 아픈 날이었다.
“오늘은 제 딸 생일입네다.”
옆에 있던 윤씨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 때를 회상했다.
“딸 아이 낳던 그날 비가 몹시 내렸습네다.”
윤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6년 되었지요. 딸애가 어려서 같이 떠나오지 못했습니다.”
고향에 두고 온 딸아이 생각에 젊은 부부는 눈시울을 적시며 필자와 헤어졌다.
윤씨 가족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혹시 공안원에 잡혀 북송되어 형들처럼 감옥에 갇히지나 않을지? 불길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 열달만에 만난 탈북자들
10개월 전에 진료했던 탈북자들과의 만남은 필자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고국을 버리고 이국의 땅에서 심한 불안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고 있던 탈북자들. 메스컴을 통해 보았던 그들을 가까이에서 진맥했던 그때의 충격은 한동안 가슴앓이를 안겨주었다.
자상한 시골 아저씨같던 김씨 가족은 필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평북 운전군이 고향인 김씨 아저씨는 만성위염으로 고생하고 있어 엑기스와 환약을 투여했는데 소식이 궁금했었다. 엑기스라는 뜻을 몰라 한약 추출약이라는 설명에 화학약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반가워하던 김씨였다.
부인과 20대 초반 아들과 함께 탈북했던 김씨는 일 나가고 집에 없었다. 탈붇 초기에는 막노동조차 생각할 수 없었는데 차츰 안정이 되면서 기본 생활비를 얻기 위해 공사 현장으로 출근하여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김씨 부인은 정색을 하며 필자를 맞이해 주었다.
“아이고. 서울 한의사 선상님 아닙네까? 이렇게 다시 찾아주실 줄 몰랐습네다.”
“김선생님은 어데 가셨습니까?”
“네. 몇 달 전부터 노동판에 일 나간다 아닙네까. 나그네께서 선상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네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남편을 나그네라 부른단다.
“아! 그렇습니까.”
“네! 그 때 선상님이 주신 약이 너무 신통하여 나그네 위장이 많아 나아져 매우 기뻣습네다.”
“다행입니다.”
“선상님이 안오시면 서울 가는 인편에 부탁드릴까도 생각해 보았는데요. 남조선 약이 확실히 다르데요.”
김씨 부인은 자신의 질병이 나은 것처럼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30일분의 위장 엑기스를 건네자 함박 웃음을 짖는데 목젖이 다보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나그네가 효과를 본 한약이니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데 있겠는가. 김씨 아저씨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먼 곳을 찾은 해외의료봉사의 기쁨을 맛보았다.
김씨 집을 나올 때 그의 부인은 필자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감사의 표시였고, 또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는 부탁의 표현이었다.
#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북한에 있을 때부터 간경화와 담석증으로 고생했다는 한씨(57세)아저씨는 저번 방문 때도 건강이 좋지 못했다. 영양부족으로 복수가 차고 혈뇨가 비치고 눈동자는 노랗게 변했는데 1년 전에 탈북하여 연길에 정착하고는 링게르액을 맞고 입밥(쌀밥)을 먹고 원기가 회복되어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젯밥(제사밥)도 없는 북한을 탈출하지 않았다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거라며 허탈하게 웃던 한씨였다.
건강이 안 좋아 몽고쪽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에서 가축을 키우며 살거라는 한씨는 10개월만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 공안원에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었던 것이다. 지옥이라 표현하던 북한으로 잡혀간 것이다. 부인인 허씨(50세)와 같이 송환되어 공산당원들로부터 구타와 감시를 받았다. 부인 역시 원인 모를 자궁소양증 대하증, 그리고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북한으로 송환된 이후로는 하지부종이 심해 거동이 불편하였다. 자궁암일 가능성이 많은 한씨 부인은 병명도 모른채 병마에 시달리며 북한땅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치료는 더욱 불가능한 그곳 사정이라 죽음을 기다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씨는 부인을 북한에 놓아두고 재 탈북하여 연길 공항 남쪽 야산 기슭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감시가 심해 감히 마을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송환된 잔인한 기억을 잊을 수 없어 거지들이나 살 수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하루해를 넘겼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비닐로 지붕을 만들고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스프링이 내려앉은 침대로 방을 만들었다. 겨우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움막은 병든 한씨를 감싸주었다.
한씨는 재 탈북에 성공했지만 그동안 고생으로 건강은 망가진 상태였다.
심한 복수와 노란 눈동자, 그리고 10개월 전보다 훨씬 야윈 얼굴. 따라오지 못한 북한의 부인과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씨는 올 겨울을 넘길 수 있을지? 아무도 찾지 않는 움막에서 조만간 사늘한 시신으로 변할 한씨. 부인과 함께 몽고에서 가축을 키우며 건강을 돌보겠다는 한씨였는데 공안원에 잡히는 바람에 희망이 산산히 부서지고 건강이 망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이산가족이 되어 북녘 땅과 연길 어느 야산에서 북망산길에 접어들고 있는 한씨 부부.
필자는 애써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참고 의료인으로서 체면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썼다.
“요즘 옥수수철이지요?”
한씨의 목소리에 힘이 있을리 없다.
“그라지요.”
“그럼 옥수수 수염을 따다 다려서 수시로 드십시오.”
“깡냉이 수염 말입네까?”
“네. 이 근방에 옥수수밭이 없습니까?”
“아닙네다. 저 언덕을 지나면 깡냉이 밭이 천집네다.”
“잘되었습니다. 물 마시고 싶을 때 옥수수 수염 다린 물을 드시면 복수가 쑤욱 빠집니다.”
“그야 어렵지 않디요.”
풀죽은 한씨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필자는 간경화가 깊어져 생긴 복수를 옥수수 수염으로 다스릴 수 없는 줄 알지만 죽음이란 판정을 내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죽음이란 판정을 내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의료인의 사명이었다..
한씨 움막을 떠나올 때 서산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이름모를 새들이 서둘러 제 집으로 찾아들고 들판의 농부들도 하루의 땀을 닦았다.
8월 중순이 지난 연길의 밤은 벌써 초가을 바람이 서늘하게 불었다. 곧 첫서리가 내리면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지는데 여윈 한씨는 독감에 걸리지 않을까?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나고 복수는 더 심해지고 말기에는 고통이 심할텐데. 그 고통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다음 연길 한방의료 봉사 때에 제발 한씨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땐 ‘인진 오령산’을 한 박스 갖다줄 수 있는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4박5일의 한방진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여행용 가방에 땀절은 몇 벌의 와이셔츠만 덩그런히 남았다. 가방은 엑기스 산제를 탈북자에게 나눠주어 텅 비었다. 그 텅 빈 가슴 만큼 가슴에 찬바람이 불었다.
탈북자들 가슴에 부는 바람을 재울 수 없었고 그들의 텅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없었다.
연길의 낙조는 왜 그리 쓸쓸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