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비아 왕진을 다녀와서
달랑 한 장 남은 12월 달력은 가볍지만 우리들 마음은 그렇지 않다.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도 있지만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큰 12월이었다. 또 한 해를 마치는 허전함으로 앙상한 가로수 길을 걷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우수에 차고, 공원에 내린 눈길을 걷는 중년 남성에게서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12월은 현실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은 유혹이 강한 시기였다.
이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들썩이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적절한 대우와 극진한 대접을 해줄테니 먼 길 리비아에 왕진을 와 달라는 제의였다. 누가 어떻게 아픈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건너와 침놓고 진맥하고 약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영문 진단서라도 보내달라는 요구도 무시하고 그저 신비의 동양의학을 리비아에서 펼쳐보라는 선처요 압력이었다.
목사가 자기 예배당에서만 기도할 수는 없고 수행승이 지리산 선방만 고집할 수는 없다. 환자가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이 의료인의 책무이리라. 진료와 생활의 일탈을 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분위기가 무거운 12월을 탈출할 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후배 한의사에게 대진을 부탁하고 왕진 가방을 챙겼다. 혈압계 혈당측정기 침 뜸 부항 전침 등등 작은 한의원이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왕진을 결정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숙면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먼 길을 가서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12월 각종 송년 모임도 불참하고 금주하고 심신을 단련하는데도 가슴은 무거웠고 머리가 맑지 못했다. 타국의 정부 고위 인사를 치료해야 하는 부담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아랍 민족이지만 동양의학을 응용하면 치료 방법은 있을 것이다. 얼굴색 다르고 식생활 다르고 문화 차이가 있지만 한의학 이론은 그 곳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리라.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며 자신감을 가졌다. 그래 부딪치는 거다.
리비아는 우선 동아건설에서 대수로 공사를 한 나라로 기억하고 혁명 지도자 가다피의 장기집권의 나라였고 사하라 사막이 있는 정도였고 그 이외의 정보는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 그래서 생소하고, 그래서 더욱 가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옛날 근로자들이 많았을 때는 서울에서 직항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럽(로마, 파리 등)이나 두바이를 경유해야 했다. 두바이는 지중해를 여행할 때 환승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필자도 그 곳을 통해 들어갔다.
참으로 긴 여정으로 인천 공항에서 두바이 까지 11시간, 두바이에서 4시간 기다려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행 비행기로 환승하여 7시간, 하루 꼬박 걸리는 먼 나라였다. 아무 대화 상대없이 비행기에 시달리고 기다리는 지루함은 정말 고행이었다.
두바이 공항 라운지는 넓고 쾌적했다. 장거리 여행객을 위해 샤워 실이 있고 종교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된 국제공항이었다. 레스토랑은 고급 호텔 급 식사가 준비되어 있고 바에는 각종 차와 음료가 제공된다. 따끈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많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내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상념에 젖었다.
그 환자를 치료하여 한국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국위를 선양하는 사명감이었다. 리비아는 산유국이지만 열악한 의료 환경이기에 먼 나라의 한의사를 초빙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대만큼 치료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해외 왕진이었다. 의료에 국경이 있겠는가, 음양오행이 어디 동양에만 존재하겠는가. 그런 긍정적인 생각으로 고단한 여행을 극복했다.
생각보다 누추한 트리폴리 공항에 도착하여 필자를 마중 나온 현지 공무원과 한국 A지사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청사를 나와 바라 본 리비아의 하늘은 높고 맑았다. 따가운 햇살과 하늘을 찌르는 키 큰 야자수를 보고서야 이국땅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치료에 대한 걱정과 치유에 대한 의욕이 교차 되었다.
호텔에서 도착하여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왕진을 청한 측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그 쪽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리비아 사람들은 일정한 스케줄대로 움직이지 않는단다. 그 들의 필요에 따라 진료가 늦을 수도 빠를 수도 있단다. ‘배려’가 없는 사람들로 아직 세련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 첫째 날
승용차로 30분정도 야외로 나가 한적한 마을로 들어섰다. 검은 얼굴의 흑인 직원이 커다란 철제문을 열어주고 다시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니 2층 높이의 대리석 기둥으로 지은 좀 위압적인 건물이 손님을 맞이했다. 진료할 건물인 그 곳은 손님을 영접하는 커다란 접견실 겸 응접실이었다. 방이 얼마나 큰지 저쪽 구석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100평은 족히 될 공간이었다. 양탄자가 깔린 대형 응접실 한 쪽에 치료받을 침대가 놓여 있었다.
서울에서, 비행기 안에서, 두바이 공항에서 그렇게 궁금하던 분은 커다란 키에 콧수염을 기른 75세 할아버지였다. 2년 전 전두부 뇌경색으로 중풍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반신불수 등이 호전 되어 보행이 불편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노환으로 식욕부진 무력 불면증 등이 주소증 이었다. 특히 불면증은 체력저하를 가져오는 주원인으로 제일 고통스런 증상이었다. 이외에 항강증과 우견비통 상지무력감 등으로 보아 경추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는데 최소한 엑스레이 등을 통해 경추 추간판 상태를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척추 퇴행성으로 추간판이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하여 나타나는 목 디스크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증상을 듣고 촉진하고 맥진을 마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온 왕진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해외 왕진인데 효과가 없다면 필자 개인뿐만이 아니라 한국 한의학의 자존심 문제였다.
우선 자침을 하고, 발침 후 복진상 복부가 무력하여 중완과 관원에 간접구를 시술했다. 강화도 약쑥 냄새가 커다란 응접실에 퍼지는데 그 향이 은은했다.
침과 뜸 시술을 마치고 침대에 앉아 상흉추와 경추를 교정했다. 노약자라 약자극으로 가볍게 척추 공간을 확보하는 시술을 했다. 마지막으로 우측 견갑골 아시혈 부위를 습부항으로 사혈을 했다.
1시간 반 정도의 정성스런 시술을 마치고 그 ‘할아버지’와 헤어져 밖으로 나오니 벌써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녁으로 양고기를 준비했는데 처음 먹어 본 음식이라 생소했는데 역겹지 않았다. 냉동하지 않은 생고기를 구이한 양고기는 매우 담백하고 고소한데 아랍 족들이 즐겨 먹는단다. 염소나 양고기가 소음인 음식이지만 그 곳 현지식이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여행에서 볼거리만큼 중요한 것이 먹거리 아니던가.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니 저녁9시, 서울 시간으로는 새벽 3시라 하품이 저절로 나온다. 긴 비행시간, 환승, 그리고 긴장의 진료. 심신이 지쳐 눈이 충혈되고 온몸이 나른했다.
오늘 치료한 그 ‘할아버지’는 좀 나아질까? 혹, 노약자를 강하게 치료하지는 않았는지? 기력이 쇠약한데 너무 자극이 심해 부작용이나 없을지?’ 궁금하고 불안했다. 이런 공상 상상에도 지친 몸은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튼 날 오후에 얼마나 효과를 보았는지 기대를 가지고 다시 그 집을 찾았다. 큰 키에 평소 과묵한 성격의 그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짙은 턱 수염이 매력적인 할아버지 아들과 필자를 대동하는 A지사 직원이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다. 환자가 아픈 증상을 아랍어로 이야기하면 아들은 A지사 직원에게 영어로 전하고, 다음 A 지사 직원은 필자에게 한국말로 전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좀 어땠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되돌아 온 말은 ‘Same' 이었다. 어제와 증상이 똑 같다는 매우 실망스런 결과였다. 참으로 침이 마르고 머리가 띵했다.
그래도 치료는 지속되었다. 어제 보다 좀 더 신중하고 어제 보다 더 정성스럽게 시술하고 교정했다. 특히 불면증은 가장 큰 건강의 적이었다. 근본 이론에 근간하여 치료한다면 주어진 시간 속에 효과가 있으리라 믿음을 갖고 치료했다. ‘기다림의 미학’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아니던가. 하루 치료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고 자신감 있게 치료해야만 했다. 이럴 때 의료인은 자신을 극복해야하는 고독을 느낀다.
# 아름다운 언어 ‘Better'
다음 날 고단한 또 하루가 지나고 그 집을 찾았다. 트리폴리 시내를 빠져 나가는데 승용차에 기름이 부족하여 주유소에 들른다. 그리 깨끗하지 않고 먼지가 많은 주유소에는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들이 줄지어 서있다. 가득 넣었는데 한화로 1만원이면 족하다. 휘발유 1리터에 200원 정도이니 기름 탱크에 가득 넣어도 1만원이란다. 리비아는 아프리카 제1, 세계 8대 산유국이면서 정부의 보조가 있어 우리의 1/10 정도이니 자동차 연료 값 걱정은 없다. 자동차 영업 사원이 ‘연비’ 를 홍보하면 빰 맞는 곳이란다. 리비아는 기름 값이 헐해 더운 나라인데도 온수가 꽐꽐 나오고 전기도 풍족하게 사용한다. 어쩌면 리비아는 기름 때문에 존재했고 기름 때문에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천연 자원이 풍부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어 좀 게으른 민족인지 모른다.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오후 2시에 퇴근하고 실업률이 높아도 전혀 걱정 없는 태평성대(?)의 나라가 리비아란다.
하지만 필자는 값싼 기름 값에 흐믓할 상황이 아니었다. 셋째 날 왕진 가는 길은 기분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느긋 하자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조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착하여 치료 준비를 하는데 그 ‘할아버지’가 응접실로 들어오셨다. 그 전날 항강증과 상지마비로 필자에게 침 시술을 받은 할아버지의 부인인 뚱뚱한 ‘할머니’도 오셨다.
짧은 수인사와 함께 어젯밤 수면상태와 식사, 그리고 어깨 통증 등을 문진했다. 훨씬 얼굴 표정이 좋아진 ‘할아버지’, 그리고 밝은 미소의 ‘할머니’ 사이에 아랍어가 오갔다. 그리고 조금 후 들리는 말은 ‘Better'였다. 할아버지는 몇 개월 만에 숙면했고 팔이 저려 고통받던 할머니도 통증없이 잠을 잘 잤다는 낭보였다. 통역을 맡은 아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Good'을 연발하고 한국 지사 직원도 얼굴이 밝아졌다. 필자의 머리는 강한 자극이 왔다. 어제는 좀 둔탁한 통증이 수반하는 자극이었는데 그 날은 상쾌하고 경쾌한 자극이었다. 짜릿한 카타르시스였다.
할아버지의 오랜 불면증은 침 효과라기보다 척추 교정 덕분이었다. 불면증은 대개 2번 경추 신경이 압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그 부위를 촉진하면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그런 경우 ‘척추진단교정학회(카페 참조)’에서 배운 제2 경추를 가볍게 해머링하면 그 날부터 바로 잠을 잘 수 있다. 이런 임상 경험은 그리 어려운 테크닉이 아닌데 그 할아버지에게는 대단한 치유 효과였다.
의자(醫者)와 환자 사이에 첫째 덕목은 믿음이다. 그 분들과 그런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했다.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믿음이 더욱 소중했다. 리비아의 왕진은 서서히 무르익어갔다.
그렇게 효과가 나타나자 큰 아들이 만성두통을 호소했고, 둘째 아들은 만성위염 증상으로 고통 받는다며 손을 내밀었다. 며느리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절대 외간 남자와 접촉을 피하는 문화였다. 그래서 망토를 눌러쓰고 눈만 조금 내고 사는 민족이 아니던가. 결혼 후에 여자는 철저히 감춰진 생활이라 외부인과 접촉은 피하고 멀리했다.
# 술과 운동이 없는 나라
리비아가 우리 생활과 좀 다른 것은 술이었다. 이슬람 경전에 술을 마시지마라는 계율이 있어 금주를 그들은 철저히 지킨다. 돼지고기 역시 사막지대인 그곳에서 쉽게 상하기 때문인지 먹지 못하도록 한 계율을 지킨다. 하루 4번 기도하라는 코란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모스크에서도 4차례 종을 울린다. ‘종교의 생활화’가 그들의 몸에 배어있다.
그래서 시내에 술집이 없고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 그래서 시내에 주정뱅이가 없고 음주 운전 단속이 없다. 물론 여행객들이 입국 길에 면세점이나 기내에서 양주 한 병 사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술을 반입하다 들키면 술을 빼기고 그 곳 경찰에게 겁나게 맞는단다.
식당에 가면 맥주가 있는데 알코올이 0%라니 술꾼들 약올리는 것 이다. ‘벡’ 이라는 무알코올 맥주가 마트에서도 파는데 우리들의 4% 맥주 보다 알코올을 제거하는 공정이 있어 더 비싸단다. 진료를 마치고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싶은데 그 곳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기야 환자 왕진 왔는데 술타령은 호사요 무리한 요구였다.
그런데 한국 근로자들은 일을 마치고 저녁에 삼삼오오 모여 술 한 잔 한단다. 현지인들이 가정에서 담근 ‘밀주’가 있는데 그 위험하고 비밀스런 술을 구해 마신단다. 필자도 리비아를 떠나기 전날 밤에 그 밀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우리들의 안동소주나 이강주 같은 증류 소주라 맛이 깔끔했다. 하기야 열흘정도 술을 굶었는데 어떤 술이 좋지 않겠는가.
리비아인 들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강단이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술을 안 마신 탓인지 모두 체격이 건실하고 건강하게 보였다. 그들에게 금주는 코란 경전을 충실히 지키는 종교인의 계율이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건강수칙 이었다.
그런데 그런 철저한 신앙심에 비해 좀 지혜롭지 못한 것은 ‘운동부족’이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하는데 모르는 모양이었다. 운동을 해야 살이 찌지 않고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건강 상식이 없었다. 더운 사막 지대에 살다 보니 운동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이다. 숲이 우거진 조깅할 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곡물이 흐르는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먼지가 많은 시내를 어떻게 달릴 수 있겠는가. 지리적으로 여름에는 영상 40도를 오르내리는데 운동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경제적으로는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무슨 운동을 챙길 것 인가. 또 저녁 늦게 식사하고 활동하지 않고 바로 자는 생활 습관, 기름에 튀긴 음식을 과다 섭취하는 식습관 등 때문에 그들은 고도 비만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리비아 국민들에게 좋은 약을 처방하고 침을 놓기 전에 식생활 운동요법 등을 상담하고 계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금주하여 지킨 건강을 비만으로 해치고 있었다.
# 리비아의 허준을 찾습니다
필자는 그 ‘할아버지’의 불면증이 완화된 것만으로도 왕진 온 보람이 있었다. 특히 노환이라 서울로 돌아가 한약을 보내 장기간 복용하면 건강이 회복된다는 처방은 그 분들에게 희망이었다.
리비아에서 한국은 매우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리비아에서 제일 큰 호텔을 지은 대우건설뿐만이 아니라 현대 기아 자동차는 트리폴리 시내를 달리는 승용차의 반을 차지하고 있어 그곳이 마치 서울인양 착각할 정도였다. 가전제품 핸드폰 시장을 점유하는 삼성 LG는 글로벌 기업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리비아에서 한방치료를 하는 것은 우선 ‘한번 먹고 들어가는 셈’ 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이루어 놓은 우호적인 관계가 의료에도 적용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치유도 있었지만 이런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 때문에 다른 분들의 치료요청이 있어 마지막에는 바쁜 일정을 보냈다. 한의학의 기본 치료인 침 뜸 부항 척추교정 만으로도 증상이 호전되고 그런 치유력으로 그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다만 치료 장면을 남기기 위해 사진 촬영을 하려고 했는데 그들의 요구로 하지 못했다.
리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국민 소득에 비해 의료가 발달 되지 않은 상태였다. 국가 지원으로 병의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데 경쟁 없는 의료시장이라 의료인이나 진단 치료 장비들도 열악하다는 정보였다. 의사에게 경제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아 능력 있는 의사들은 해외에서 활동한단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어느 기업인의 절규가 한국 젊은 한의사들에게도 적용되지 않을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한의사 인구 밀도가 높은 한국에서 보다 좀 더 넓은 의료 시장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개인뿐만이 아니라 한국 한의학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능력있는 한의사들이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로 진출하여 한국 한의학이 세계적인 의학으로 발전하는 것은 필자만의 희망은 아닐 것 이다. 기회의 땅은 전 세계에 널려 있을 것 이다.